'최종후의 통계 칼럼' 연재목록

 - 제 57차 'ISI 국제통계대회' 참관기
 - 인구동태 통계의 문제, 그리고 노후소득보장 체계
 - 춤추는 여론조사
 - 현실과 동떨어진 소비자 물가지수
 - OECD 세계포럼의 그늘
 - 인구 주택 총조사에 숨어있는 문제
 - 국가통계 체제를 쇄신하자

최종후 / 한국통계학회 부회장 겸 국가통계연구회장 / 고려대 교수

예컨대 대선/총선후보의 지지도조사, 지자체 주민의 만족도조사, 국민 사회의식조사, TV 시청률조사, 스포츠맨/연예인 인기도조사 등 그 유형은 실로 다양하다. 또한 소위 마케팅 서베이로 일컬어지는 소비재 제품의 이미지조사/만족도조사는 이제 기업의 상품개발 및 판매전략 등 마케팅 전술 전략 수립의 필요불가결한 요건으로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 TV 오락프로에서 조차 앙케이트를 이용한 프로그램이 유행할 정도로 여론조사는 우리 곁에 가까이 다가와 있으니 가히 여론조사 홍수시대라는 말이 지나친 것이 아니다. 앙케이트(enquête)는 통계학적 이론에 근거한 표본설계 과정이 생략된 설문절차를 말하는 것이니 흔히 TV 오락프로에 행해지는 설문조사는 여론조사가 아닌 앙케이트라고 함이 옳다.

자명하게도 민주사회는 대의정치(代議政治)에 그 바탕에 두고 있으니 올바른 여론의 수렴절차와 이에 근거한 정책의 수립과 집행은 민주사회의 필요불가결의 요건이다. 종종 접하게 되는 사회문제의 많은 부분들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정부당국의 국민 여론수렴과정과 그에 대한 대응책이 미숙하고 엉성하여 초래된 문제임을 눈치 챌 수 있다.

올바른 여론 수렴에 근거한 정책수립과 집행 필수
이제 여론조사는 민주사회를 지향하는 국가에서 여론 수렴의 도구로서 그 당위성을 인정받게 되었으니 그 결과를 기사 또는 보도의 형식으로 국민에게 전달하는 국민과의 채널 접접인 신문, 방송 등 언론매체는 단순히 정보전달자의 기능에서 나아가 여론조사라는 공공재(公共財)를 올바르게 전달해야 할 중요한 사명을 부여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되돌아보고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 있다. 우리 사회의 여론조사는 올바르게 수행되고 있는가? 현실에서 접하게 되는 여론조사의 생산과 언론매체에 의한 그 전달과정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심각한 회의가 드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마치 제품의 품질이 좋고 나쁨이 있는 것과도 같이 여론조사 역시 품질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접하는 상당수의 여론조사가 질적인 측면에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다. 저질의 여론조사는 여론을 오도(誤導)하게 되며, 왜곡된 여론조사에 입각한 정책수립은 현상을 왜곡할 수 밖에 없다. 오늘, 춤추는 정부시책의 이면에는 춤추는 여론조사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여론조사가 사회 일반에 폭넓게 적용되기 시작한 것은 1940년대에 꽃핀 통계학의 ‘표본이론’과 그 궤도(軌道)를 같이 한다.

통계적 추론이라고 함은 관심의 대상이 되는 모집단의 축소판인 표본을 획득하여 그 성격을 규명함으로써 모집단을 이해하고자 하는 일련의 절차를 말하는데 이때 모집단의 성격을 제대로 대표할 수 있는 대표성 있는 표본을 얼마만큼의 크기로 어떻게 획득할 것인가 하는 점이 문제시 된다. 이를 궁구하는 학문분야가 표본이론이다. 표본이론에 의하면 제대로 조정되고 통제된 표본획득절차에 근거하면 모집단의 축소판인 표본으로서 모집단의 성격을 충분히 설명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들 표본의 크기가 1000개인 조사보다는 10000개인 조사가 10배는 더 정확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지 않다. 표본수의 결정문제는 조사의 신뢰도, 추정의 오차한계와 같은 통계이론과 결부된 것인데 표본이론에 의하면 일정 규모의 표본이 적절한 절차에 따라 수집된다면 이로써 모집단을 추론하는데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1937년 갤럽(Gallup) 연구소를 설립한 조지 갤럽(G. H. Gallup)은 이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갈파한 바 있다. "국을 끓인다. 국 맛을 본다. 가마솥에 끓일 때, 냄비에 끓일 때, 국 맛을 보기 위하여 맛보는 양이 다른가? 당신은 가마솥에 끓일 때에는 한 바가지 양으로 맛을 보며, 냄비에 끓일 때에는 한 스푼의 양으로 맛을 보는가?" 문제는 무엇인가? 국 맛을 보기에 앞서 ‘잘 젓는 행위’가 필요하다. 소위 표본이론에서는 표본틀(sampling scheme)이라는 도구를 써서 ‘잘 젓는 행위’를 대신한다.

공영 여론조사심의기구 출범시켜야
지금은 한풀 꺾인 듯 하지만 수년전 시중에는 ‘암소한마리’라는 음식점이 유행처럼 번진 적이 있다. 서너명이 둘러 앉아 암소 한마리 부위를 골고루 맛을 보게 하는 것이다. 이만원어치 등심부위 만을 먹을 수도 있으며, 이만원어치 머릿고기 만을 먹을 수도 있지만, ‘암소한마리’ 처럼 여러 부위를 골고루 먹을 수도 있다. 과연 암소한마리를 모두 먹어보아야 암소 맛을 알 수 있는 것인가?

이제 우리 사회도 고도 민주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이에 따라 각 분야에 걸쳐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여 의사결정의 기반으로 삼으려는 여론조사 수요는 보다 폭넓고 급속하게 확대되고 있다. 여론조사문화를 제대로 꽃피우기 위하여 어떠한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인가?

공정한 여론조사가 수행되는 여건 조성을 위한 법적, 제도적 정비책이 강구되어야 한다. 이에 근거하여 정부의 간섭을 떠나 법적 독립성을 인정받는 공영 여론조사심의기구를 출범시켜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ABC(Audit Bureau of Circulation, 신문발행부수公査기구) 조사 등이 행해지고 있지만 이를 확대한 개념의 보다 포괄적 성격의 ‘공정한 여론조사를 위한 공영 여론조사심의기구’가 발족되어야 한다.

민간 여론조사기관이 수행하는 여론조사도 발표 전에 이 기구에 의하여 그 생산과정의 적절성을 검토, 추인 받는 절차를 거칠 필요가 있다. 질적으로 수준 이하인 여론조사가 횡행하는 사회에서는 왜곡된 정보가 횡행하게 될 것이며 이는 다시 예측불가의 사회를 만들게 된다.

8월 30일자 ‘매일경제’를 보니, 한국ABC협회가 9월 4일 개최하는 ‘정부광고제도 변경과 ABC 부수공사’ 세미나를 보도하고 있다. 보도 된 내용의 취지를 보면 문화체육관광부는 ‘ABC에 참여하는 매체에 정부 광고를 우선 배정할 수 있다’는 현행 정부 광고 시행에 대한 총리 훈령을 ‘발행 부수 검증에 참여한 매체에 정부 광고를 배정한다’는 내용으로 정부방침이 바뀌게 되어 이에 대한 설명회를 갖는다는 것이다.

문화부 관계자는 "정부의 홍보매체 선정 광고를 의뢰한 정부기관 및 공공법인의 광고 희망 매체를 존중하되, 신문과 잡지에 광고하는 경우 광고 질서 확립을 위해 한국ABC협회의 전년도 발행 부수 검증에 참여한 신문 및 잡지에 정부 광고를 배정하기로 했다"고 밝히고 있다.

ABC는 발행부수 공사기구를 말한다. 신문과 잡지 매체의 판매부수, 즉 유료 정기구독 부수와 가판 부수를 합하여 정기적인 심사 결과를 공표하는 기구이다. 이렇게 검증된 자료는 독자에게는 매체에 대한 알 권리를 충족시킬 뿐만 아니라 광고주에게는 매체효과 예측에 필요하다.

1963년 창설된 국제ABC연맹은 회원국의 ABC 관련 정보와 노하우의 공유, 공사(公査) 기준 작성 등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996년 정회원이 되었다.

ABC의 역사가 40년을 넘어선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경우 매체의 공신력을 위해 ABC가 주도하는 검증에 매체사에서 6개월마다 자발적으로 보고서를 제출하게 하며, 1년에 한번 씩 ABC의 실사에 임하도록 하고 있다. ABC는 정기구독 부수, 가판 부수, 그리고 광고를 위하여 도심별, 상권별, 그리고 지역별 판매 부수를 보고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문 발행부수 공사가 '92년 7월부터 시작되었지만 일부 신문사만 참여하고 상당수의 신문사가 아직 참여하지 않고 있어서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실정에 있다.

올바른 여론조사가 올바른 국가정책의 초석
정부가 이렇게 나설 수 있는 것은 지난해 기준으로 정부는 신문과 잡지에 총 1,217억원의 광고를 집행한 사실상 국내 최대 인쇄매체 광고주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ABC협회의 힘은 한층 강화될 것이다. 이제 남은 일은 한국ABC협회의 발행부수 검증 시스템의 과학화일 터이다. 한국ABC협회는 현행 발행부수 검증시스템이 완전하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공정한 여론조사가 꽃필 수 있는 토양을 만들도록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때이다.

프랑스는 1977년 ‘여론조사에 관한 법’을 제정하여 이 법에 따라 여론조사 결과를 외부로 공개하는 경우 여론조사의 목적, 질문내용, 조사지역, 피조사자의 수 등에 대해 사전보고토록 하고 있다. 이 법은 필요시 피조사자의 주소와 성명 명단을 제출토록 한 뒤 이들에 대해 같은 내용을 똑같은 방법으로 재조사토록 요구한다.

글을 마무리하면서 강조한다. 개인적 기호선택의 편견으로 여론조사를 조작하는 그릇된 의도가 작용하면 이미 그러한 여론조사는 의견제시자의 역할을 잃은 것이다. 여론조사는 자기설(自己說)을 위로하기 위한 방편으로 수행되어서는 안된다. 여론조사는 오직 객관성과 가치중립성에 철두철미 입각해야 한다.

명심할 일이다. 춤추는 여론조사는 춤추는 정책을 낳는다. 춤추는 여론조사는 춤추는 사회를 만든다. 춤추는 여론조사는 춤추는 국가를 만든다.